여행기 - 보은과 청원 떠나기

아이 첫 여름 방학의 마지막 주말이라,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주려고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도 아랑곳하지 않고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어디로 갈지 미리 정하지 않은 채 하루치 갈아 입을 옷만 달랑 싸서는 차에 올라 타고는 비가 좀 덜올 것 같다는 강원도 쪽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로 차를 몰았다.

판교에서 들어가 영동고속도로로 가는 길이 막힐 것이라 지레 겁을 먹고는 신갈로 내려가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갔는데, 깜빡하고 대전 쪽으로 들어서게 되어 영동고속도로를 탈 수 없게 되었다. 뭐,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정한 곳도 없는 내맘대로 여행인 것을. 내친 김에 남쪽으로 가는데, 차들이 꽤 밀린다. 차도 많은데 비가 오니 더욱.

정처없이 떠날 때 좋은 방법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려 관광안내지도를 보고 당기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안성 쯤에서 휴게소에 들려서 지도를 훑어본 우리는, 1박 2일 여행에 너무 멀리 내려갈 수는 없으니 속리산으로 가보기로 했다. 글자쓰기에 재미가 붙은 아이에게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찾도록 하고 남쪽으로 달리다가 천안에서 당진-상주간 고속도로로 갈아타니 차도 없고 길이 시원스러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빛이 산과 들이 싱그러운 보은이다.

속리산 국립공원에 가기 바로 전에 길 왼쪽에 옛날에 정이품 벼슬 받았다는 소나무가 우뚝 서있는데, 익숙한 삼각형 모양이 아니라 한쪽이 수직으로 잘려져 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안내문을 읽어 보니 2004년 겨울에 갑자기 쏟아진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해 가지들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가지마다 버팀목으로 세워놓았다. 800년이나 그 자리를 지켜온 나무인데, 눈앞에 보고 있자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욱 커진다.

[정이품송]

비도 오락가락하고 아이도 있어서 속리산은 법주사까지만 다녀오기로 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출발했다. 궂은 날씨지만 지친 발걸음을 옮기겨 이미 산을 내려오는 등산객들이 꽤 많았다. 두팔로 안아도 다 안을 수 없는 고목들 사이로 걸어 올라가니 어느덧 법주사 앞이다. 입구 왼편에 글씨가 새겨진 거대한 바위가 먼저 눈에 들어와 따라가 보니 집채보다 큰 바위 서너덩이가 서로 힘 자랑 하듯 듬직한데, 오른쪽 바위에는 부처도 조각되어 있다. 바위들 틈으로 나오는 약수로 목을 적시고 사찰 안으로 향하니, 금옷을 입고 있는 거대한 불상과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5층 목탑이 이루는 경치가 멀리 속리산 자락과 어울려 시원스럽다. 아이는 무거워서 들기도 힘든 사진기로 자기도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셔터를 계속 눌러대는데, 우연인지는 몰라도 사진의 구도를 잡는 솜씨가 제법이다. 좀 더 자라면 사진사로 데리고 다닐만 하겠다. 내려오는 길에 시냇가 맑은 물에서 잠시 물고기와 장난을 치는데, 얼마나 날랜지 물고기가 우리를 데리고 놀아주는 꼴이다.

[법주사 가는 길의 시냇가]


법주사 앞 찻집에서 팥빙수와 식혜로 목을 축이고 나니 3시가 넘었다. 흐린 날씨에 해가 지기 전에 하루 묵을 곳을 찾기 위해 구병산 자락의 구병아름마을로 달렸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가다 삼가저수지를 지나서 고개를 넘으니 산골짜기 안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갑자기 눈앞에 다가온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많지 않은 집들이 옹기 종기 모여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황토벽에 기와지붕을 올린 민박집으로 올라가 보니 높지는 않아도 힘차게 솟아 있는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진 마을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마당에 온갖 꽃들이 가지런히 피어있는 구병산장은 인심도 넉넉해서, 김치며 복숭아며 알아서 챙겨 주신다. 창문을 열어 놓으니 방안에 산 바람이 가득해서 방안에 있어도 산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충북알프스라는 좋은 등산로가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는 모양인데 2박은 해야 하는 쉽지 않은 길이라고 한다. 다음에 꼭 한번 오르고 싶다.

[구병산장에서 내려다 본 구병아름마을]


아이와 카드놀이를 하고 책을 함께 읽은 뒤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경치는 그대로인데 날이 더 흐려졌다. 600년 되었다는 서원리 소나무와 99칸 선병국가옥을 구경하고 청원의 청남대 바로 옆에 있는 대청호미술관을 둘러보고 나와서 잠사박물관으로 향했다. 대청호미술관은 언덕을 따라 꽤 걸어올라 가야해서 다리가 팍팍하다. 아이가 방과 후 과학실험에서 누에를 키운 적이 있어 한번 가보자고 해서 나섰는데, 청주역을 지날 때쯤부터 하늘에 구멍이 난 듯 비가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우산을 쓰나마나 온 몸이 다 젖은 채로 박물관으로 들어가니 예상대로 사람은 거의 없다. 비 쏫아지는 날 잠사박물관이라니. 전시관을 돌아보고 안내원이 틀어준 짧은 영상을 보고나니 비가 좀 줄어들었다. 이번에 처음 안 것이지만 사람이 키우는 누에나방은 날개는 있어도 날지 못 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도 살 수가 없다고 하니, 사람이 몹쓸 짓을 한 것이 아닌지. 이제 점심 챙겨 먹고 집으로 가야 한다.

[선병국가옥(1)]
[선병국가옥(2)]

[대청호 미술관에서 내려다 본 대청호]

내려 올 때 막혀서 올라가는 길은 고생스러울 줄 알았는데, 비가 와서인지 국도나 고속도로 모두 차들인 많지 않아 막히지 않고 잘 올라왔다. 올라오는 길에 조치원에서 길가에서 파는 복숭아 두 상자를 사서, 한 상자를 들고 처가에 들렸다. 이제 나이가 드셔서 아픈 곳도 많으시지만 장모님 음식 맛은 역시 최고다. 이렇게, 아이의 첫 여름 방학의 마지막 날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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